‘밝은 색’ 그리운 그림 시장 -장기 침체에 빠진 국내 미술계의 숙제와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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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기를 걷고 있는 한국 미술 시장에 이례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지난 10월4일 홍콩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개최된 서울옥션 제5회 홍콩 경매에서 59점 중 37점이 낙찰되어 낙찰률 63%, 낙찰 총액이 우리 돈으로 약 100억5천2백만원을 기록한 것이다. 대박이라고 부를 만도 하다. 하지만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경매 작품에는 마르크 샤갈의 <동물들과 음악>이 약 41억6천7백만원에 낙찰된 것이 ‘100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는 데 한몫했을 뿐이다. 거품이 낀 국내 ‘유통가’보다 싼 홍콩 경매를 이용해 역수입에 나선 것이다. 국산 대형차가 미국에 싸게 수출되면서 가격 차이 때문에 경쟁력이 생겨서 역수입되는 구조와 비슷한 사례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국내 미술 시장의 장기 침체가 미술 시장 구조 자체를 왜곡하고 있는 사례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홍보나 프로모션 능력이 약한 소형 화랑은 국내 대형 갤러리가 특정 작가를 적극적으로 프로모션하면서 작품가를 띄울 때 소장전을 열거나 경매 시장에 내놓아 ‘대세에 편승’하는 식으로 이득을 취하기도 했다. 시장 왜곡까지 불러오는 미술 시장 침체 원인을 놓고는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다. 내년부터 미술품에 대한 양도세 부과가 시행되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많고, 2007년 무렵 거품 형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시장에 참가했던 초보 컬렉터들이 속절없이 떨어지는 작품 가격에 대거 이탈해 나가면서 싸늘하게 식었다는 분석, 또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옥션 회사의 난립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까지 다양하다. 대세 상승기에 등장한 옥션은 미술 시장이 팽창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시장이 아래로만 처지고 있는 요즘에는 국내 옥션의 영업 행태가 국내 시장을 왜곡하는 데에 한몫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화랑가를 찾는 국내 콜렉터들은 오래전부터 작가의 작품을 경매 시장 가격과 비교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들은 경매 가격과 큰 차이를 보이는 동일 작가의 화랑 판매 가격을 보고 놀란다. 특히 대형 갤러리의 전속 내지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경험한 젊은 작가군보다는 이들 화랑과 상관없는 중견 작가 작품의 가격이 높은 데 놀란다. 경매 시장은 2차 시장이다. 유럽 등 선진 시장은 1차 시장인 화랑에서 작품이 팔리고 난 뒤 통상 14~15년 뒤에 경매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이 통례이다. 1, 2차 시장이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대형 화랑의 횡포와 세금 문제 등이 작가 의욕 꺾어 그러나 국내 경매 시장은 대형 갤러리가 겸업하고 있다. 양대 옥션 회사 중 하나인 서울옥션은 코스닥 등록 기업으로 1대 주주가 가나아트이고, 2대 주주가 코스닥 시장의 황제로 불렸던 권성문 KTB그룹 회장이다. 미술계에서는 가나아트의 전속 작가를 정하는 것에도 권성문씨가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이다. 케이옥션은 갤러리현대·표화랑 등 기존 대형 화랑들이 지분을 나누어 갖고 있다. 이 양대 경매 회사는 로열티가 강하고 상품성이 강한 화랑 소속의 전속 작가나, 재능은 있으나 작품 가격이 싼 젊은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화랑과 경매 시장에 동일 시점에서 띄운다. 작고 작가를 제외하고는 1, 2차 시장의 경계 구분이 무의미해진 셈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실력이 있는 중견 작가는 국내에 미술품 경매 시장이 등장한 10여 년 전부터 이들 대형 화랑과 경매 회사들로부터 소외받기 시작했다. 4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 사이 연령대의 화가들이다. 이들 중견 작가군은 독립군처럼 홀로, 가끔은 중간 규모 크기의 화랑의 도움을 받으며 자립을 모색했다. 일각에서는 이들 그룹의 작품가가 호당 50만~100만원대로 경쟁력을 키우자, 이들을 견제하고자 과거 이들이 생존을 위해 기존 화랑을 거치지 않고 중간 판매상에게 직접 판매했거나 지인에게 선물로 준 작품성이 떨어지는 작품을 집중적으로 경매에 내놓아 이들의 예술적 기반을 폄하하려는 경향마저 있다고 한다. 호당 100만원대에 작품이 팔리는 이른바 블루칩 전업 작가도 맥을 못 추는 것이 요즘이다. 미술 작품의 특성상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여 작품가를 낮추어 팔 수도 없다. 고가에 동일 작가의 작품을 산 컬렉터의 자산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 보니 거래가 뜸해지고 전업 작가들은 시장 침체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한때 차세대 블루칩 작가로 분류되며 성장 가도를 달렸던 한 전업 작가는 3개월 전 연 개인전에서 차세대 블루칩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단 한 점의 작품도 팔리지 않아 작가는 물론 갤러리 쪽에서도 충격을 받았을 정도이다. 전문 컬렉터들은 이런 시장 상황을 이용해 인기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대폭 할인을 요구하고, 결제 조건도 할부나 어음을 요구하는 등 ‘슈퍼 갑(甲)’의 위치에서 화랑을 압박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이런 거래 관행이 수용될 경우 향후 미술 시장이 더욱 왜곡될 것은 분명하다. 동산방화랑의 박우홍 대표는 “국내 미술계 경기는 옥션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전성기에 비해 옥션 거래액이 3분의 1 토막이 났다”라고 전했다. 해외에서도 한국 작가의 작품은 힘을 못 쓰고 있다. 홍콩의 크리스티나 소더비 경매에서 한때는 40% 가까이 차지했던 한국 작가의 작품 비중이 20% 이하로 줄어들었다. 장기 침체에 빠진 미술계에서는 결국 세금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박대표는 “미술 시장의 국제화를 위해서라도 국내 시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미술품에 대한 양도소득세 시행을 5년간 유예하는 문제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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