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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2000 최기득 글

리얼리티의 마찰, 그 혼란속의 꽃

 
리얼리티의 마찰, 그 혼란속의 꽃

 

화와 리얼리티


피셔는 "예술의 목적은 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은 리얼리티의 모방일 수 밖에 없고 기껏해야 리얼리티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변형시키고 수정한다"고 말하였다.


장기영의 그림을 대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회화와 관련된 이러한 리얼리티 개념이다. 어떻게 보면 피셔는 리얼리티를 너무나 제한적으로 고려한 듯 하다.


다시말해 피셔는 회화란 결국 자연이라는 리얼리티의 반영(reflection)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 절하한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리얼리티를 이용하지만 리얼리티를 선택하며, 더 나아가 리얼리티를 해명하고 해석한다"는 텐느의 말을 떠올리면 다소나마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예술가는 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사물이 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타고르)


리얼리티의 혼란 또는 재창조


그러나 장기영이 그의 그림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리얼'함의 출발점이 자연이 아니라 사진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즉 그는 자연이라는 리얼리티를 선택하고 이용함에 있어서 사진적인 리얼리티(photographic reality)를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근래에서 현대에 이르는 서양미술의 전개에 있어서 회화와 사진은 다분히 복잡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처음에는 사진이 회화를 모방하였으나, 점차 회화가 사진을 모방하거나 최소한 사진의 장점을 응용하게 되었다. 사진의 순간성을 좋아했던 인상파, 사회적 발언의 수단으로서 사진을 오브제로 활용했던 다다이즘, 그리고 사진과 인쇄매체를 액면 그대로 화면에 등장시켰던 팝아트와 포토리얼리즘에 이르기까지 사진은 이미 회화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사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진화된 사진 매커니즘의 차용에 다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 쥐어지게 되었음은 그리 놀랍거나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화가들이 선택하는 대상은 직접 관찰된 자연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 여과된 '자연의 이미지'이며, 또한 그들은 망원렌즈를 비롯한 각종 카메라웍으로 구성된 전혀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다.


눈의 즐거움, 심리적인 바이브레이션


장기영 역시 이런 작업방식을 수용하고 있으나, 그 한계를 어느 정도 예측하여 독자적으로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은 그 치밀한 묘사능력이나 현상의 현란함이 아니라, 카메라 매카니즘의 미적인 차원을 과감하게 제시하고 그것의 회화적인 변용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실물 그대로'라는 것에 민감하지만, 예술가는 더욱 깊은 의미에서 '훌륭한 것'의 생산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리얼리티를 자신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제시할 수 있다.


무릇 대부분의 작가들이 학창시절에 경험하였고 지금의 학생들도 그러하듯이, 장기영 역시 사물의 충실한 재현이야말로 화가의 본분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가시적 리얼리티의 정복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면서도, 그 속에 비가시적인 리얼리티를 담기 위한 시도를 보여준다. 그는 슬쩍 지나치듯이 느껴지는 시적인 이미저리(imagery)의 끄트머리와 함께 '현상의 재구성'보다는 '회화적 사실의 구성'을 의식한 듯한 몸짓을 취한다. 다시말해 그의 사진작인 리얼리티를 자신감 있게 수용하면서도 결코 그 표피적인 복사에만 머무르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컨스터블이 '모방의 어리석음'과 '묘기의 우월감'에 대해 경고한 적이 있듯이, 만일 장기영 자신과 우리가 트롱프레이유에 유혹되고 거기에만 머무른다면 그의 작업은 과소평가 될 수 밖에 없다. 묘사적인 회화는 화가가 본 것 또는 속으로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바라건대 장기영은 이미 경험한 형상, 즉 너무나 많이 사용해서 닳아버린 까닭으로 단순한 반복에 그치고 표현력을 고갈시킬 따름인 형상속에 안주하지 말아야 겠다는 의식을 가졌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회화란 물리적인 현상으로서의 빛이 아닌, 예술가의 두뇌속에 존재하는 빛을 표현하는 방식임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면 더 좋겠다.


- 최기득 (대구 예술대학교 서양화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