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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2006 김희승 글

사진의 시각을 빌어 재현한 회화적 사실

사진의 시각을 빌어 재현한 회화적 사실


클로즈업된 커다란 꽃잎, 나뭇잎에 맺힌 이슬방울 등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하는 화가 장기영


장기영의 작업은 그의 리얼리즘의 출발이 자연의 직접적인 관찰이 아니라 카메라의 메커니즘에 의존한다는 면에서 다른 극사실주의자들과 접근법을 같이 한다. 하지만 그만의 특이한 측면은 사진적 메커니즘에 대한 의존을 의도적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사진을 순간의 기록, 시각적 형상의 고착(좀더 정확하게는 기억의 고착)이라는 메커니즘에 주목하고 이를 회화를 위한 보조수단으로 이용한다.(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사진의 의존이라는 측면을 교묘하게 은폐 또는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기영은 사진의 순간성보다는 작은 사각의 프레임을 통해 본 사진의 구도 혹은 카메라라는 기계가 가지는 클로즈업이나 아웃포커싱 등의 기계적이며 비시각적 요소에 주목한다. 장기영의 그림 속에서 대상은 전체의 형상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클로즈업되거나 혹은 초점이 안 맞아 정확한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그려진다. 작가는 카메라 메커니즘의 미학적 차원을 노골적이고 과감하게 제시하고 그것의 회화적인 변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완성된 작품은 사진과 회화라는 두 매체간의 혼성물로서도 보이며 관람자로 하여금 시각적, 지각적 혼동 속에서 사실의 재현의 문제에 대한 의문을 품도록 자극한다.


장기영은 재현의 대상으로 주로 ‘꽃’을 선택한다. 그것도 절정에 이르러 활짝 핀 꽃. 그것은 단순하게 만개한 꽃의 화려한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꽃이라는 주제가 생명 변태와 시간의 변화를 극명하게 드러내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곧 덧없이 사라져버릴 아름다움, 그리고 생명. 꽃을 대상으로 선택하면서 장기영은 작품 속에서 시간과 생명에 대한 다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적인 차가운 관조의 시선을 담는다. 마치 차가운 카메라의 렌즈가 그러하듯……. 이로 인해 클로즈업되고 기계적 시선으로 해체된 꽃은 화면 속에서 꽃이되 꽃이 되지 못하는 이중 정체성의 문제에 부딪힌다.


장기영의 작품이 가시적인 현실의 완벽한 재현물로서, 프롱트뢰유의 묘기로 이루어진 피상적 화면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철학적˙사유적 영역을 가로지르는 것은 바로 작품이 작가의 관조와 카메라적 시선이 엇갈리는 교차점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김희승  박영덕화랑 큐레이터